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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시 명 : PAUSE

■ 전시작가 : 황성준 개인전

■ 전시기간 : 2021. 10. 29(금) – 12. 03(금)

■ 관람시간 : 10:00 AM ~ 6:00 PM (일요일 휴관)

■ 전시장소 : 갤러리세줄 / www.sejul.com / 서울시 종로구 평창30길 40.

■전시작가소개

, 기둥, 그림자

존재 경험의 우회로

김노암

1

은색, 백색 그리고 검정은 새로움에 대한 무한한 공간을 은유한다. 프로타주로서 드러나는 흔적은 또 다른 실체와의 경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예감한다. – 작가 노트

작가의 작업은 팽팽하게 힘과 에너지가 채워진 공간을 품은 금속 질감의 표면이 특징적이다. 표면의 광택은 필연적으로 신, 이데아, 진리 등을 은유한다. 빛은 이곳이 아닌 저곳의 실체를 반영한다. 표면의 빛과 색은 실재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비실재적이다. 촉각할 수 없다. 특정 시간과 공간, 특정 시각과 위치에 고정시킬 수 없다.

황성준 작가의 작업은 오랫동안 초월의 문제를 사유하고 표상하는데 예술의 비전을 제시해왔다. 인간의 눈은 빛에 눈이 멀거나 표면을 미끄러지며 황홀한 환영을 본다.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 나와 너가 연결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상대적이며 동시에 절대적인 것이 동시에 겹치며 공존하는 시간을 열어 놓는다. 현실 사건과 잠재 사건이 동시에 나타난다. 빛과 색을 통해 이상적 실체와 가상의 질료가 대치한다.

차원과 차원이 만나는 다차원의 경계에서는 힘과 에너지가 격렬한 떨림과 긴장으로 충돌한다. 그러면 이차원에서 보는 현상과 다른 차원에서 보는 현상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작가는 드러남과 감춤의 이중의 운동을 통해 다차원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의 표면 위에서 펼쳐지는 빛과 색의 변화가 하나의 이미지에 모든 차원의 이미지가 연결되어 있는 어떤 지점을 떠올릴 수 있다. 빛과 색은 형이상학적 미학의 태반이다. 빛과 색은 아무리 분할하여도 분할되기 이전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고대 지혜에 따르면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된다.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된다. 고정되지 않은 채 순간순간 뒤바뀌는 세상의 모습과 규칙의 예측불가능한 우연성을 빛과 색의 무수한 운동과 그 운동에 부여하는 의미의 고정점들이 표면에 튀어오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지각의 운동의 힘이 임계점을 지나 지표면으로 융기하듯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유아하게 솟는다. 솟는 에너지와 지면에 고착된 에너지가 긴장과 탄성을 만들며 빛과 색의 파노라마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잠시 멈춰서서 바라보고 생각한다.

2

정지의 순간 속에는 측정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간의 흐름이 있다. 그것은 창조의 시간이자 소멸의 시간이다. 모든 것이 다시금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 것이다. – 작가노트

황성준 작가의 대표적인 시리즈인 기둥 작업도 이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잆다. 전시공간에 연출된 기둥은 뭔가를 지탱하기 위한 기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지붕, 건축물을 지탱하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다. 그러나 단지 그 기둥 자체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허공에 뚝 솟는다. 태양신을 기리는 오벨리스크처럼 작가의 기둥은 무언가 숭고한 존재를 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둥은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동시에 빛과 연결된 상징이다.

오벨리스크나 신전의 기둥들은 지구상의 물질 중 시간을 가장 오래 견디는 돌로 만든다. 그런데 작가의 기둥은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멸하기 쉬운 이미지로 제작된 기둥이다. 기둥은 태양의 반대편에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태양이 움직이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 해시계처럼 기둥의 그림자는 시간을 은유하는 지표이다. 따라서 시간의 변화에 대적하는 돌기둥은 역설적으로 시간(크로노스)의 파괴적 힘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둥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힘을 상징한다.

작가는 인간이 존재의 문제를 지향하는 개별자이자 동시에 보편적 존재자라는 이중의 존재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비존재를 은유하는 그림자와 허상이 그림자의 원인이 되는 물질계의 대상을 전복하도록 연출한다. 그림자는 무겁고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다,

강철로 만든 고정된 그림자는 불가능한 표상이다. 진짜(?) 그림자의 변화를 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짜 그림자와 가짜 그림자 사이의 긴장이 극대화된다. 여기서 본래 가짜(비실재)인 그림자를 진짜(실재)로 만드는 마법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강철 그림자는 그림자의 본래 속성인 변화와 비실재성을 확실한 실재성의 경험으로 바꿔버린다. 존재보다 더 무거운 비존재를 떠올린다. 그림자는 비물질성을 상징한다. 이미지, 또는 허상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 물질계와 비물질계, 중력과 반중력이 조응하면 우리의 의식에 출현한다. 기묘한 은유가 만들어진다.

3

고요의 순간, 드러남과 감추어진, 사이, 그 틈에 담긴 침묵 작가 노트

거대한 사막에서 낮과 어둠을 경험하면 사람의 마음은 경건해지고 신을 만나거나 종교적 사유에 몰입하게 된다. 실체와 신기루가 공존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가 지상에 도래한다.

황성준 작가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 서있는 것처럼 사유하고 움직인다. 어둠이 찾아온 사막은 밤하늘을 가득채운 무수한 별빛의 화려한 천공이 펼쳐진다.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낮이 밋밋한 하나의 빛의 세계라면 밤은 무수한 종류의 빛들의 세계이다. 낮이 동일성의 빛이라며 밤은 차이의 빛들로 풍요로운 존재 경험을 제공한다. 사막 한가운데 서서 명상하는 고요와 침묵은 존재와 비존재가 드러나는 시간이다.

최근 허공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 작품은 사실 거꾸로 지상을 향해 세워진다. 이 사다리는 윗부분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중력을 거부하는 사다리의 속성이 반전되어 지상을 향해 꽂혀진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사람은 거꾸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그리고 지상에서 지하로 하강한다. 자기 속성과 자기 현실을 초월하는 자기 파괴적 해체의 과정을 관통하며 새로운 시각과 방식의 형식이 모색된다.

고유한 것, 변하지 않는 것, 초감성적인 정신적인 것은 동일성 아래 표상되었다. 반면 차이 아래에서는 그 반대의 것들이 표상되었다. 변하지 않는 것과 항상 변하고 있는 것, 존재와 운동, 정과 반, 밝음과 어둠, 위와 아래. 서로 상대하고 상응하는 것들은 이원론적 세계에서는 결코 만나지 않는다. 언제나 서로의 표면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형식적인 미의 시각으로는 잡히지 않는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것들, 차이들이 포착되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의 밖에서 상상하고 존재하는 것들은 실체가 없는 비존재일 뿐이다. 허구이고 허상이다. 그러나 바로 밖의 세계가 예술가들의 상상과 사유를 양육하고 촉발한다. 여기서는 존재 경험, 무의 경험 없이는 표상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운동이 펼쳐진다.

황성준 작가는 현대미술의 전통에 한 발을 딛고 다른 한 발은 그 밖으로 나아간다. 작가의 작업은 존재와 비존재의 대응을 경험하는데 있다. 그런데 비존재의 경험이 가능한 것일까? 비존재의 경험은 존재의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드러남과 감춤은 존재와 비존재 또는 비존재와 존재 사이의 변화를 은유한다. 하나는 밝음 속에서 드러나고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또는 어둠 속에서 드러나고 밝음 속에 감춰진다. 창작된 것 또는 존재하게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을 세심하게 계획하고 연출하는데 작가는 오랫동안 몰두해왔다. 창조와 소멸이 동시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을 연출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무엇이든 가능해진다.